이야기 - 이종훈 애국지사 해설사가 들려주는 안장자
답:그렇다. 문:장래에도 또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답: 나는 한일합방에는 조선사람이기 때문에 물론 반대했고, 앞으로도 기회만 있으면 (독립운동을) 할 것이다.- 1919년 3월 20일 이정훈 애국지사 서대문감옥 조서 중 -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명은 민족독립을 위해 독립선언을 하고 종로경찰서를 나온 일본경찰에 검거됩니다. 당시 64세로 민족대표 33인 중 최고령이었던 이종훈 애국지사는 일본의 취조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독립운동 의사를 밝혔습니다.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한 이정훈 애국지사는 고령에 지병까지 있어 몹시 몸이 아프고 가족들이 받은 고충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종훈 애국지사와 그 가족은 나라를 위해 끊임없이 앞장섰습니다.5월 어버이날 이정훈 애국지사 가족들은 선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요? 가정의 달을 맞아 선대의 업적에 버금가는 5대 후손, 약 100년간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나의 조국을 찾는 길이라면 나의 모든 것을 바칠 것이다.1대. 이정훈(1856~1931) 1856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이정훈 애국지사는 10대에는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의친왕 이강, 윤치서(윤보성 대통령의 큰아버지) 등과 문학당에서 이 글을 배웠습니다. 1893년 20대에 동학에 입문하여 동학농민전쟁의 지도자로 활약하였습니다.이후 동학이 천도교로 창건될 때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고, 1919년 3.1독립선언서 준비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독립선언으로 2년간 투옥된 뒤에도 1920년대 문화운동과 민주주의 확산을 지지하며 만주 무장투쟁과 국내 민족세력을 연계하기 위한 고려혁명당을 이끌고 독립운동을 전개해 왔습니다. 이에 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이종훈 애국지사는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21호에 모셔져 있습니다2대 이관영(1883~1907) 이종훈 애국지사의 외아들인 이관영(족보명) 선생은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의 장녀 손관화와 결혼하여 신학문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귀국하여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완용을 암살 기도 및 이완용 집안에 방화를 주도하였습니다. 이후 양평에 은신하여 용문산 일대 의병을 규합해 왜군에 항전하였고, 1907년 교전 끝에 사망하였습니다.3대 이태웅(1900~1967 ) 이태웅 선생은 7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이정훈 선생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에 참여합니다. 보성학교를 다니던 1919년 20세 때 독립선언서 준비작업 중 연락 임무를 맡았고, 소파 반정환(손병희의 둘째 사위 : 이태웅의 조카아버지/어린이날 제정)과 같이 독립선언문 인쇄물 배포 등을 맡아 3대가 함께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